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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손만두 정정남 대표

기사승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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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년간 칼칼한 김치만두만 빚었지"

  "노동 중에 상노동이다. 정말 힘들다. 온 몸 안 아픈 데가 없다. 정말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쉬어야 할 것 같다."
 

 자유상가 지하에 들어서면 오른쪽은 떡볶이와 순대집이, 왼쪽으로는 만두를 빚어 파는 상가가 있다. 3평 남짓한 공간에 밀가루 반죽과 만두소를 만들어 놓고 쉴 틈 없이 만두를 빚는 곳이다. 손만두와 칼국수 면만 판매하는 단일품목 가게다. TV를 보면서도 손님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손은 만두를 빚고 있다. 32년간 만두를 빚었으니 정말 눈감고도 만두쯤은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달인이다. 올해로 32년째 자유상가에서 봉산만두를 운영하고 있는 정정남(82) 대표는 이 골목에서는 터줏대감이다. 10개 남짓한 만두 상가 중 가장 오래 됐고, 초창기부터 이 자리에 앉아 장사를 했다.
 

 30대에 남편을 잃고 혼자 전국 5일장을 다니며 잡곡 등을 사다 시장에 판매하는 일을 하며 3남매를 키운 정 대표. 50세가 되니 전국을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아 선택한 것이 만두 가게였다. 특별한 기술 없이 시작할 수 있었고 마침 자유상가 지하에 임차를 할 수 있었다. 새벽5시30분이면 출근해 3시간 정도 만두소와 피를 만들어 놓고 만두를 빚기 시작하는 것은 오전9시쯤. 오후9시까지 하루 종일 앉아서 정 대표가 하는 일은 만두를 빚고 칼국수를 미는 것이다.
 

 봉산만두에서 만두를 사는 사람들은 일반시민보다는 만둣국 가게가 더 많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필리핀, 홍콩 등에서 택배로 정 대표의 만두를 찾는다. 고향이 그리운 교포들에게 정 대표의 만두는 엄마 손맛이었다. 20여년 전만 해도 만두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장사가 잘 됐었다. 하루 20㎏ 밀가루 한 포대를 다 쓸 정도였다.

 한 달에 1천만 원을 거뜬히 벌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개당 166원으로 30개 5천 원 하는 만두가 당시에는 한 개에 33원 정도로 30개에 1천 원씩 판매할 때였으니 한 달에 적어도 30만개 정도는 빚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지금은 일회용 포장 용기가 워낙 잘 나와서 손님들이 찾아와도 어렵지 않게 만두 포장을 해 줄 수 있었지만 그때는 메리야스 박스가 유일했다. 틈나는 대로 중앙시장 옷가게나 속옷 가게에 가서 박스를 구해서 가게 뒤편에 쌓아 뒀다.
 

 "그때는 여기 골목이 화기애애했다.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니 가족 같았고 점심, 저녁 때가 되면 같이 음식을 해서 나눠먹곤 했다. 처음 온 손님들도 말 한마디가 따뜻했다. 한 마디로 정이 있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할수록 삭막해지는 것 같다"며 아쉬워하는 정 대표.
 

 자유상가가 원주시민 쇼핑의 중심지였던 시기도 있었고, 불황에 못 이겨 빈 상가가 많아 을씨년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 세월을 묵묵히 지켜본 정 대표다. 손님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봉산만두를 지키다 보니 3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하루 종일 앉아서 만두를 빚다보니 정 대표 말대로 '몸이 성한 곳'이 없다. 연골 수술은 벌써 했고, 손가락도 어깨도 물리치료를 받지 않으면 힘들다. 양 팔을 제대로 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정 대표가 매일 봉산만두를 지키는 것은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단골손님 덕분이다. 정 대표 만두 맛의 비결은 아끼지 않는 양념. 김치도 직접 만들어서 이틀간 숙성시켜 쓰고 마늘, 파 등 모든 양념을 듬뿍듬뿍 넣는다. 또 맛이 칼칼해 뒷맛이 매력적이다 보니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기다.
 

 만두를 배우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서울에 와서 만두 가게를 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만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빚어 번 돈으로 20여년 정도 월세로 있던 가게를 4천만 원 들여 샀을 때의 기쁨은 이루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3년 전쯤에는 뒤쪽 3평 정도를 더 사서 김치를 버무리거나 만두소 등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작년부터 그만두려고 했는데 정년퇴직한 아들이 만두소에 들어갈 김치도 썰어주고 도와준다고 해서 나와 있다. 너무 힘든 일이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정말 올해가 마지막일 것 같다"는 정 대표. 아쉽지 않느냐고 묻자 "여든 넘어서까지 일했는데 아쉬움이 있으면 어떡하냐"며 활짝 웃었다.
 

 마음 편히 며칠씩 쉰 적도 없고 월 2회 자유상가가 쉬는 날에는 부족했던 잠을 자거나 밀렸던 살림을 하기 바빴다는 정 대표. 가게를 접으면 이제 사찰 성지순례 다니며 기도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서연남 시민기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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