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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길목에 서서

기사승인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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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 다음 계절을 준비하며 침잠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다. 어느새 입동이 며칠 뒤다.

 

  가을이 깊어간다. 마을 앞 방죽길에 줄지어선 벚나무 단풍이 참 곱다. 일찍 물이 든 은행나무들은 이따금 휘몰아치는 찬바람에 우수수 낙엽을 쏟아낸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도 많은데 한쪽에선 벌써 낙엽이 진다.
 

 어느새 곳곳에서 얼음이 얼고 산간마을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들린다. 앙상하게 옷을 벗기 시작하는 나무들, 그 발밑에 누렇게 말라가는 풀잎들,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예년보다 일찍 추위가 닥쳐왔고, 당분간 초겨울 날씨가 계속되리라는 일기예보가 뉴스 시간마다 들려온다.
 

 요즘 들어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왜 이렇게 계절이 빨리 바뀌는 거지? 지구의 공전속도가 갑자기 빨라진 것은 아닐까? 지독한 폭염과 가뭄에 헉헉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듯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와 모조리 바꾸어 놓다니. 뭔가 예전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작은 바람에도 툭툭 잎을 떨어뜨리는 감나무를 무심히 바라보다, 황혼 무렵 금대리 방죽길을 걷는다. 길옆 밭둑과 멀리 바라보이는 산기슭엔 노란 감국이 한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절초가 하얗게 피어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렇지, 자연의 섭리가 변할 리 있겠나.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들꽃이 아닌가. 화보랏빛 쑥부쟁이가 피었다 지면 이어서 흰 구절초가 피고, 그 뒤를 이어 노란 감국이 피고. 그들은 세상없어도 때맞추어 피고 진다.
 

 잠시 멈춰 서서 수확이 끝나 텅 빈 논을 바라본다. 고요하다. 며칠 전만 해도 황금색으로 넘실거리는 들판에 벼를 베는 콤바인소리가 왁자했는데. 지금은 축축하게 젖은 논바닥에 적막감만이 감돈다.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의 논바닥을 바라보고 있자니 공연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때가 어쩌면 사계절 중 가장 황량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비평가인 N.프라이는 가을을 비극의 원형이라고 했다. 계절의 특성상 소멸과 죽음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이라고 해서 어찌 소멸과 죽음만 있으랴. 이 시기는 봄에 시작되었던 모든 활동이 결실을 보고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 다음 계절을 준비하며 침잠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겨울이 시작되는 절기인 입동이 며칠 뒤로 다가왔다.
 

 입동(立冬), 겨울의 길목. 입동은 우리의 겨울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기이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때도 입동 무렵은 추웠다. 그것도 갑자기 추워졌다. 아버지는 마지막 가을걷이에 쉴 틈이 없으셨고,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김장 준비에 바쁘셨다. 뒷마당에 멍석을 펴고, 아침 일찍부터 우물물을 길어 씻은 배추를 쌓아놓고 속을 넣느라 하루 종일 분주했다. 김장을 하는 일은 겨울채비 중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햇빛 밝은 날, 아버지는 방문을 모두 떼어내 새 창호지를 바르셨다. 방문 손잡이가 있는 부분에는 꽃잎을 따다가 무늬를 만들어 넣기도 했다. 그때는 창호지 한 장만으로도 한겨울 매서운 바람을 넉넉하게 막아냈었는데.
 

 민속대사전에 보면, 지방에 따라서 입동 날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쪄서 집안 곳곳에 놓고, 한 해 동안 농사일에 힘쓴 소에게도 먹이면서 1년을 마무리하는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는데, 이런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있을까.
 

 집안을 돌며 난로 불쏘시개로 쓸 마른 나뭇가지들을 추려 묶어놓고 나니 새삼 겨울이 임박했음을 느끼겠다. 그런데 터앝에 심어 놓은 배추들은 미처 크지도 못했는데 겨울로 들어섰으니, 아무래도 우리 집 김장은 입동을 한참 지나서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종호 시인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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