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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균 교정상담복지회 대표

기사승인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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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수 양자로 입적…수십년 옥바라지로 사회 복귀

   

무기수도 사형수도 내 자식처럼…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147번의 실패를 겪었다. 라이트 형제도 비행에 성공하기까지 805번의 쓴 맛을 봤다. 포기하지 않는 자가 성공할 수 있다는 '147805' 법칙. 한국교정상담복지회 박이균(73) 대표는 오늘도 '147805'를 되뇌며 구치소로 향한다.

교도소나 구치소 수감자의 교화를 돕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1990년 안양교도소 교정위원이 된 뒤 여러 교정시설에서 재소자들의 자립·자활을 도왔다. 8년 전 문막읍으로 이사 와서는 한국교정상담복지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만나는 수감자는 무기수나 사형수가 많다. 사회 복귀 가능성이 낮아 교도소 안에서도 자포자기하는 이가 적지 않기 때문. 많이 나아졌다지만 예전만 해도 동료 수감자를 폭행하거나 영치금을 빼앗는 경우가 흔했다.

박 대표는 "단기수감자들은 사회에 복귀하면 가족이 반겨주지만 장기수는 있던 가정마저도 해체되는 경우가 많다"며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는 일이 교정위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인 그는 교도소 안에서 포교활동에 힘썼다. 수감자가 출소해서는 경제적 자립이나 취업 지원에 땀을 흘렸다. 때로는 출소자로부터 "돈을 안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라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에 지금까지 손을 못 놓고 있다.

그렇게 만난 사람 중에는 김명민(가명) 씨도 있다. 2003년 서울에서 무기수로 수감 중일 때 박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다른 사람들은 교정위원을 만나면 나한테 어떻게 이득이 될까 궁리하기 바쁘다"며 "명민이는 생각이 일반 수감자들과 많이 달랐다"고 회상했다.

전국 교도소를 돌아다닐 때에도 한 달에 서너 번은 시간을 내 명민 씨를 찾았다. 그 때마다 '무기수 신분이지만 회개하면 가석방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가 교도소 안에서 20여개의 전문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던 것도 박 대표의 끈질긴 구애 덕분이었다. 명민 씨가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할 때면 박 대표가 온 가족을 동반해 응원했고, 상을 타면 자식이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박 대표는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새로운 삶을 안겨주고 싶다는 애착이 강해졌다"며 "한 사람만이라도 바른길로 돌이켜보자는 생각에 양자로 삼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박 대표의 결심을 말하자 모두 손 사레를 쳤다. 특히 아내의 반대가 컸다. 부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명민 씨의 호적 입적은 지금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박 대표는 법무부장관, 청와대에 아들 명민 씨의 사면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죽기 전에 아들과 함께 살아보고 싶다"고 보낸 탄원서는 수백 통에 달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명민 씨는 수감생활 수십 년 만에 가석방 됐다.

올해 2월, 박 대표는 명민 씨와 교도소 밖에서 재회했다. 결사 반대를 외치던 박 대표의 아내도 명민 씨의 출소 날엔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자녀들은 옷과 신발을 사주며 가족으로 맞이했고 박 대표는 집 한켠을 내주며 사회적응을 도왔다. 지금 명민 씨는 수도권 건설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하며 건실한 삶을 살고 있다.

박 대표는 "명민이가 객지에 나가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하며 안부를 묻는다"며 "늦게 만난 아들이라 더 살가운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는 박 대표의 교정활동 공로를 높이 사 지난 10월 국민포장을 수여했다.

최다니엘 기자 nice4sh@naver.com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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