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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장 충혼탑과 친일인사의 추모사

기사승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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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정미년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였으나 대한제국에서 특사가 왔음을 알게 된 일본 대표 고무라는 그 즉시 대한제국이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온갖 방해를 하였습니다.
 

 결국 회의장에 못 들어가게 되자 특사들은 각국의 대표와 개별로 만남을 갖고, 평화 화의 의원들의 비공식 화합이나 국제 협회에 출석하고, 각국 신문사에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돌리기도 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을 황제로 옹립하였으며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을 통해 통감정치를 강요하였고 순종은 군대해산 조칙을 공포하였습니다.

 그 후 8월 1일 일제의 군대해산에 거부한 서울시위대 군인들은 4시간 동안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봉기였으며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해산되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 시위대의 해산 소식을 들은 민긍호 의병장은 원주읍 장날인 1907년 8월 5일 오후2시 봉기를 선언하였으며 이 봉기는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습니다. 민긍호 의병장은 한양 출생으로 1897년 진위대에 입대해 원주 진위대, 고성 진위대, 춘천 분견대를 거쳐 원주 진위대 본대로 들어오셨고 봉기 당시 무기고를 개방해 무기와 탄약을 장터에 모인 읍민들에게 분배 하였습니다.

 그 후 민긍호 의병부대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정부는 항복을 권하였으나 민긍호 의병장님은 항복을 거절하시고 친일 관료 처단과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을 계속하셨습니다.

 1908년 1월 결국 일본군은 민긍호 의병부대에 집중적인 대규모 토벌대를 투입하였고 의병부대는 토벌대의 투입과 동시에 혹독한 추위와 탄환 부족 등의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영월군 수주면 궐덕리에 주둔하고 있던 민긍호 의병장님은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강림으로 호송되던 중 총에 맞아 순국하셨습니다. 비록 후에 나라는 망하긴 하였습니다만 민긍호 의병장님과 같은 분이 있었기에 일본의 국권침탈을 늦출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민긍호 의병장님의 묘역 앞에 있는 충혼탑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판했던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친일파 정일권의 추모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 군대 소위로 근무하였고 자신의 모교인 광명중에 방문해 일본 군대에 입대할 것을 권한 친일파입니다.

 하지만 정작 의병장님 묘역 앞에는 민긍호 의병장님과 관련한 안내판만 있을 뿐 정작 정일권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당시 자신의 친일 경력을 세탁하기 위해 새긴 이 글을 보며 저희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저와 친구들은 지난 6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민긍호 의병장 같은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고 친일파 정일권의 행적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채 충혼탑에 새겨진 정일권의 추모사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것에 죄송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친일파 정일권의 행적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꼭 있었으면 좋겠고, 후에 청소년들이 민긍호 의병장 묘역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원주의 영웅이신 민긍호 의병장님께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세요.

한현수 원주고 역사동아리 '역사랑 답사랑' 회장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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