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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 이재걸 선생님을 기리며

기사승인 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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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웠던 시절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가, 하루에 크로키를 수백 장씩 해내는 화가, 그림밖에 모르는 화가로 선생은 내 마음 속 영원한 스승

 

 새해 벽두에 이재걸 선생님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건강을 잃으신지 몇몇 해가 되어 어느 정도 예견은 하고 있었지만 소식을 접하는 순간 가슴 한편이 스러지는 듯 충격이 가시지를 않는다.

 이렇게 원주미술 1세대의 시대가 저물었다. 선생은 88세를 사시면서 원주미술과 삶의 궤적을 함께 해 오셨다. 선생의 삶이 곧 원주미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54년 정훈장교로 근무하게 된 젊은 나이에 원주와의 인연이 시작되어 대성고와 성화여중고(현 상지여중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그리고 원주 최초의 사설미술학원을 설립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 내셨다.

 필자는 지난 1975년 가톨릭센터 3층에 소재하고 있었던 '민 아뜨리에'에서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첫 대면에서부터 격의 없이 대해 단번에 마음을 열어 놓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친화력은 선생의 타고난 성품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이러한 성품은 작품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선생의 작품에서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꾸밈없는 따듯한 감성이 묻어난다.

 선생은 원주미술협회 창립멤버이고 제3대와 7대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미술협회와 지역사회와의 교감에 힘써 오셨다. 나전칠기장 일사 김봉룡 선생을 지역에 알리는데 앞장서시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서예작품을 문예진흥원 초대전에 추천하여 출품하게도 하셨다.

 제7대 원주미술협회장으로 재직하던 1985년에는 변변한 전시장이 하나도 없었던 원주의 현실을 안타까워하여 가칭 '원주예술회관' 건립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하셨다. 선생은 전시회 취지문에서 "후일 이 터에 찬란한 치악문화의 꽃을 피워 결실을 다져갈 문화의 전당, 예술적 공간을 오늘 우리가 초석이 되어 벽돌 한 장 쌓는 마음으로 이 대열에 자발적 동참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참여를 호소하셨다. 그 뜻에 공감한 원주를 비롯한 강원도내 50여 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기증, 원주문화원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축적되어 현재 원주는 치악예술관 등 문화 인프라가 갖추어진 도시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1년 필자가 원주 최초의 사설화랑인 원갤러리의 큐레이터로 있으면서 개관기념 초대전으로 선생의 첫 개인전을 열어 드렸을 때 많은 제자들이 모이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선생은 "개개인의 창조성을 극대화시켜 원주미술을 세계적인 미술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작업에 매진할 것"을 역설하셨고, 2004년 필자의 강원도미술협회장 취임식에서는 "협회는 거창한 담론이나 화려하게 포장된 미학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경향과 회원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도록 도와야 한다"라고 협회의 역할을 독려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말년의 베토벤이 청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와 작곡을 한 것처럼 선생은 극히 쇠약해진 시력을 가지고도 감각적으로 작업을 하셨다. 이처럼 천재적인 감각을 화면에 빠르게 옮기기에는 적합했을 수 있어서인지 종이와 물이 만나는 수채화와 먹 작업을 많이 하셨다. 하루빨리 원주시립미술관이 개관되어 박물관에 기증된 선생의 4천여 점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삶이 녹녹치 않아서 예술인들에게는 더 어려웠던 시절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가, 자연이 좋아 바르비종화가들처럼 야외스케치를 즐겨 다닌 화가, 하루에도 크로키를 수백 장씩 해내는 화가, 그림밖에 모르는 화가로 선생은 내 마음 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살아 계실 것이다. 존경과 사랑을 선생님의 영전에 드린다.

 2020년 1월 제자 권대영

권대영 전 원주예총 회장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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