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아버지와 국밥

기사승인 2021.01.25  

공유
default_news_ad1

- 내가 좋아하는 국밥은 먹을 게 넉넉지 않던 60년대 어린 시절 양껏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날의 단골음식이기도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날이 쌀쌀해지면 어김없이 시장 국밥 생각이 난다. 술을 먹은 다음 날이면 더욱더 그렇다. 배고프던 시절 든든하게 배를 채우던 음식이어서 그런지 세월이 흘러도 그 맛을 입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국밥은 먹을 게 넉넉지 않던 60년대 어린 시절! 양껏 고기를 먹는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날의 단골 음식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큰 잡화점 가게가 동네 근처에 있어 추석이나 설날 전 제수품을 구하기가 쉽지만, 예전 시골에서는 대목장이 열리는 장터까지 가야 했다.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제수품을 마련하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어머님은 장을 보러 떠나기 전 이것저것 사야 할 것들을 적어 아버지한테 드리면, 맏이인 나를 데리고 장을 보러 간다. 장터로 가는 길은 자갈투성이 시오리 신작로다. 아버지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면서 집안의 대소사 얘기를 듣는다. 멀리 도라쿠(트럭) 한 대가 털털거리며 우리 앞을 지나간다. 지나간 뒤 뽀얗게 이는 먼지 속에 몇 번인가를 입을 막고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면,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집들과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터가 멀리 보인다.

 그쯤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조금 오르면, 작은 언덕에 비스듬히 서 있는 허름한 국밥집이 하나 보인다. 아버지가 장보기 전 단골로 찾으시던 음식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고기 냄새 물씬 풍기고, 일 년에 두어 번 보는 나를 기억해 주는 주인아주머니가 계시는 반가운 집이다.

 아버지가 국밥 두 그릇과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하자 금방 김치 접시와 소금이 담긴 접시가 놓이고, 이어 막 솥에서 퍼 담은 국밥 두 그릇이 나온다. 그릇 위로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하얀 김! 그 아래 이름도 모를 고기들이 그득했지만, 무슨 고기인지는 모른다. 시오리 먼 길을 걷느라 허기진 배를 채운다. 그렇게 국밥을 먹고 나와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장대로 받쳐 세운 하얀 천막이 줄지어 쳐있고 그 아래 새로운 상품들이 넘쳐났다. 나무판 위로 잘 개어 정리된 새 옷들, 싱싱한 생선과 울긋불긋 과자들. 여기저기 먹을거리도 많았다.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가 장터에 넘친다. 아버지 뒤를 따라 이곳저곳 들리면서 어머니가 적어주신 목록에 따라 아버지가 제수품을 골라 사면 나는 큰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메고, 마지막 제수품을 다 살 때까지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짐꾼이 된다.

 이렇게 장을 보다가도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 나누느라 바쁜 아버지! 가끔은 아는 분에게는 인사드리라며 나를 소개하면,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곤 했다. 한참을 장을 보고 나면 해도 뉘엿뉘엿 저물고 날이 어둑어둑할 때쯤 마지막으로 양말 가게에 들러 가족 수대로 양말을 사서 보자기에 담고, 마지막으로 신발가게에 들른다.

 가족들의 명절 빔인 고무신도 살 겸, 신발가게 주인이 아버지 친구분이시라 그동안 안부며 밀린 얘기 나누시는 동안 나는 짐을 내려놓고 쉬는 곳이다. 아저씨와 밀린 얘기를 마치고 신발가게를 나서면 장보기는 끝나고 오던 길을 돌아 집으로 향한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한참 장터를 도느라 오기 전 먹었던 국밥은 이미 배에서 사라졌다. 집으로 가는 길, 들렸던 국밥집을 한 번 더 들어선다. 이번엔 국밥이 아니라 막걸리 한 주전자에 고기가 한 접시가 나온다. 아버지는 먹으라며 내 앞으로 밀어 놓는다. 아버진 술 한 잔에 고기 한 점! 꼭 그렇게 드셨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국밥집을 나서면, 제법 주변은 어두워지고 아버지와 나눠 챙긴 제수품을 등에 지고 집으로 향한다. 그 먼지 일던 신작로, 추석 대목장 땐 달빛에 길게 누운 미루나무 그림자를 하나둘 넘는 재미로 걸었지만, 설 대목장 때는 눈발이 섞인 매서운 겨울바람과 싸우면서 걸었다. 그렇게 집에 들어서면 날은 이미 저문다.

 저녁밥 지어놓고 기다리시는 어머니와 동생들! 대문 가까이 도착하면 소리높여 동생들을 부른다. 그러면 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뛰어나와 장을 보고 돌아오는 아버지와 나를 맞으며 짐을 받아들고 함께 들어온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생들한테 궁금해하는 시장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다 보면,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이어지고, 동생들은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 후, 길이 바뀌고 대중교통이 좋아지면서 나의 이런 장보기는 그치고 말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장 보러 다니면서 먹던 국밥, 또, 오가면서 다정하게 들려주던 모습은 늘 과묵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정감 가는 아버지를 함께 기억하게 하는 '국밥'에 대한 추억이고, 입맛이다.

 아버지 따라 시장에서 먹던 그 국밥에 대한 기억이 지금은 아련하지만, 그때 그 맛만큼은 내 입과 몸이 잊지 못해, 직장을 잡고 도회지로 나온 이후로도 줄곧 시장 주변의 국밥집을 찾는다. 시오리 신작로, 미루나무 사이로 비치던 밝은 달빛 그리고 눈보라, 따끈한 국밥과 함께 다정하던 아버지 모습이 그리운 마음이다.

이동진 평원문화연구소 wonju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