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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 한 대라도 있었으면…

기사승인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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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화재 위험에 노출된 채 겨울을 나고 있는 달동네의 내 친구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그 꼬마들을 위해…

 

 늦은밤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평소 같으면 밥 먹었냐로 시작하는 우리들 대화지만 그 날은  달랐다. "뉴스 봤어?" "뉴스?" "불난 집 애들이 우리 동네 애들이야" 그리곤 울먹였다. "걔네 되게 귀여웠는데…" 술 취한 친구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 명륜동 남산에 있는 친구 집을 찾았다. 아니, 올라갔다는 말이 정확하다.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친구 방에 들어섰다. 내 키로 바로 서면 정수리가 닿는 합판 천장 아래 구부정하게 서서 친구에게 물었다. "밥은 먹었냐?" 간밤의 술이 덜 깼는지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일단 앉으란다. 워낙 좁은 방이라 대충 비비고 앉아 동네에서 전날 일어난 화재사고를 들었다.

 불은 새벽 3시쯤 일어났다. 뉴스에선 추운 날씨를 이겨내려고 밤새 켜놓은 난로를 불씨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판잣집처럼 낡고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 일단 시작된 불은 난로가 있던 그 집만 삼키지 않았다. 내 친구가 기억하는 바로 그 아이들이 잠자던 옆집으로 순식간에 옮겨붙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대여섯 집 건너 살던 동네 청년이 목격했다. 부리나케 좁은 골목길을 돌아 불꽃이 향하는 아이들 집으로 뛰어갔다.

 담벼락도 없이 골목길에 붙은 창문 틈으로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손이 보였다. 연기를 마셔 의식이 거의 없는 30대 여성이 작은 창문으로 겨우 끌려 나왔다. 그 여성을 구해낸 동네 청년은 그때 창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잠에서 깬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 그 방에는 아직 두 아이가 남아있었다. 9살과 7살 남매. 집안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시뻘건 불꽃에 가로막혔다. 가파른 골목길에 모여든 동네 사람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아이들 엄마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화마가 내지르는 소리가 커지면서 아이들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불은 1시간 20여 분만에 꺼졌다. 달동네 주택 4채를 태운 뒤였다. 이 불로 어린 남매와 필리핀에서 온 아이들 외할머니가 한집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문화 주부인 아이들 엄마는 병원에서 겨우 깨어났지만, 충격이 너무 커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장에 다니던 그녀는 코로나 사태 여파로 일감이 줄어들어 몇 달 전부터 실직한 상태였다고 한다. 아이들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비보를 전해 들었다.

 술 취한 친구 넋두리를 들어주곤 참혹한 화재 현장을 찾았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10년 넘게 재개발구역으로 묶여 있는 이 동네. 시청에 소방차 들어올 수 있게 도로 좀 내달라고 건의한들 동네 사람 말마따나 예산 없으니 어쩔 수 없다며 번번이 거절당할 게 뻔하고. 그렇다고 판자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이대로 두면 또 이런 비극이 일어날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급한 대로 머릿속에 소화기를 떠올렸다.

 소화기가 단 한 개라도 있었다면, 소화기로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올 단 한 뼘의 공간이라도 만들 수 있었다면 그 아이들을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잘난 원주시장 한번 해보겠다고 난 척하며 정치판에서 얼렁대는 내가 사람 목숨을 구하고 재개발구역의 달동네를 화재 위험에서 건질 수 있는 방편이라며 생각해 낸 것이 고작 2만 원도 안 되는 소화기라니.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하지만 나는 뭔가 하고 싶다. 아니, 우리는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상황을 되돌릴 순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화재 위험에 노출된 채 겨울을 나고 있는 달동네의 내 친구를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내 친구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그 꼬마들을 위해. 미안하다 얘들아.

원강수 원주 시민공감연대 대표 wonju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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