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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의 단상

기사승인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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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산 거북바위에 올라 부모님과 할머니 산소가 있는 산을 바라보며 합장을 하고 내려오면 괜히 못다한 효도를 조금이라도 한 것 같아 기분이 홀가분해 졌다

 

 칠순이 넘은 지금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려보면 난 참으로 부모님께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아들인 것 같다. 내 어머니께선 42세에 막내인 나를 낳으셨다. 당시만 해도 주위에서 '그 나이에 애를 낳다니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고 한다.

 난 큰형님의 아들인 조카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삼촌과 조카가 흥업초등학교 같은 반이 되다보니 형제로 잘못 아는 친구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주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환갑이 넘은 아버지가 기뻐하시던 얼굴도 떠오른다. 그런데도 난 친구들 앞에서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뻘 같은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에 창피함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 되돌아보니 참으로 철이 없었다.

 다음해 아버지는 봇돌논 12마지기를 당시 중학교 2학년인 내 명의로 사 놓으셨다.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면 쌀이 먹고 사는데 기본인데 쌀 걱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들이었다. 지방대학을 나와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부모님 두 분만 대안리에 사시고 우리 3형제는 모두 원주시내에 살고 있을 때였다. 형님들은 자녀들 학교 문제로 인해 이사를 못하고 어린 아들 둘만 있는 내가 어머니 집으로 이사해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인 소상, 대상, 3년상을 어머니와 애들 엄마가 하게 되었다. 지금은 전기밭솥에 인덕션 같은 좋은 시설이 있지만 그때는 나무로 밥을 짓고 석유풍로로 국을 끓이면서 만 2년간 따뜻한 메(밥)와 국과 반찬을 건너 방에 마련한 지청상에 삼시 세끼를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아들인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막내며느리인 애들 엄마만 무척 고생을 했다

 안채 건너 방에 지청을 차려 놓고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아침 새벽에 분향을 했다. 몹시 추웠던 겨울아침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리워서인지 방바닥에 앉아 슬피 우시는데 불을 지피지 않아 냉방이었다. 나는 발이 시려워 어머니께 "그만 그치시라."고 재촉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탈상을 한 후 몇 년이 지나 어머니께서는 중풍으로 두 번이나 쓰러지셨다. 첫 번째는 그래도 보행을 하셨는데 두 번째는 거동을 거의 못하시고 가끔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인 내가 남자라 거북해서 그런지 나보다는 며느리인 집사람이 받아내기를 원했다. 이래저래 집사람만 고생을 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집사람을 불러 앉혀놓고 집안사람들이 문병을 와 조금씩 준 용돈을 모은 70여만 원을 집사람 손을 꼭 잡고 쥐어주셨다. 눈물을 흘리시며 무언가 말씀을 하시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대소변을 받아 줘서 고맙다는 말씀으로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집에서 지내던 집안 제사도 모두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하셨던 것 같다.

 그후 며칠이 지나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시고 처음에는 큰형님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결국 막내인 내가 집안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결국 집사람만 또 고생을 시키는 같아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철이 없어 효도를 못한 자책감인지 몰라도 10년 전만 해도 매일 새벽 봉화산 거북바위에 올랐다. 대안리 부모님과 할머니 산소가 있는 산을 바라보며 합장을 하고 내려오면 괜히 못다한 효도를 조금이라도 한 것 같아 기분이 홀가분해 졌다

 지금은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중학생 때 아버지가 사주신 논을 직접 경작하는데 농사철에는 매주 한 번 정도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논에 갔다가 합장된 부모님과 할머니 산소를 찾아 풀을 뽑으며 못 다한 효도를 자책하곤 한다

 나는 아들 둘만 있어 흔히들 '목메달'이라고 하는데 다행히 두 아들이 딸 둘과 아들을 각각 낳아 손녀딸 넷과 손자가 둘이다. 딸 둘과 아들을 낳으면 '금메달'이라는데 나는 손녀딸 넷과 손자 둘이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금메달 2관왕'이라고 자랑하곤 한다. 매주 토요일이면 큰며느리와 큰아들이 초등학생인 큰 손자를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내게 한다.

 큰손자도 우리집 오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휴대폰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인지 선뜻 나선다. 태권도 시범도 보여주고 요즘 트롯 대세인 '찐이야'도 춤을 추며 불러주는 손자가 대견스럽고 우린 정말 행복을 만끽하곤 한다.

 난 잠이 든 손자를 꼭 껴안으며 "너는 큰 아들이니 할아버지처럼 불효를 저지르지 말고 네 엄마, 아빠한테 효도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시부모님한테 효도 잘하는 네 할머니 같은 여자를 만나 집안 제사도 계속 이어가게 해다오."라며 또 꼭 껴안는다.

 손자 옆에 누워 잠이든 집사람이 요즘은 팔 다리가 너무 쑤신단다. 부잣집 큰딸로 태어나 막내며느리로 시집을 와서도 시아버지 3년상과 시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고 집안 제사를 도맡아 지내다보니 아마 골병이 들었나 보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집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나도 잠을 청한다.

김효열 원주향교 전교.강원도전교협의회장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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