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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재에 남은 청국 상인의 자취

기사승인 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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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의 역사 한 스푼-치악재 성황당

   
▲ 치악재(가리파재) 성황당 유래비. 고갯길을 이용하는 보부상들의 안전을 위해 돈을 모아 토지를 구입하고 성황당을 세워 성황제를 지낸 후 호환과 도적의 피해가 감소했다고 한다.

치악재 성황당을 살펴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치악재 일대가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관련 학살이 있었던 곳이란 자료를 확인하고 치악재 정상에 도착해서 치악산과 백운산으로 연결되는 부근에 남아있는 자취와 흔적이라도 있을까 찾아본 적이 있다. 하지만 보도연맹 학살 관련 흔적은 찾지 못하고 성황당에 들러 성황당의 유래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치악재, 금대리에서 신림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예전엔 가리파 성황당 고개, 신림 고개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치악산과 백운산이 연결되는 지형에 만들어진 험준한 길이지만 구한말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통로였다. 하지만 워낙 깊고 험한 길이라 호랑이를 비롯한 산짐승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거나 몸이 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호환과 도적의 피해를 줄이고, 고갯길을 이용하는 보부상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돈을 모아 토지를 구입하고 성황당을 세워 성황제를 지냈다. 성황제를 지낸 후 호환과 도적들의 피해가 감소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보부상단 상인들 뿐 아니라 청국 상인들도 동참해서 당제 인원이 수백 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이후 성황당은 치악재 주변에 사는 주민들과 보부상단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청나라 상인들도 성황제에 참여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들도 치악재를 넘어 원주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상인은 어떻게 원주까지 들어올 수 있었을까? 임오군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은 1882년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해서 청 상인이 조선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 상인이 원주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치악재 유래비 내용이 1888년 이후 성황제 내용이기 때문에 청국 상인의 내륙 진출 이후 시기와 연결된다.

치악재 주변 주민들과 보부상단 구심체 역할
청 상인도 성황제 동참 당제 인원만 수백 명

▲ 성황당 유래비 뒷면. 확대한 오른쪽 사진 첫 번째 줄을 보면 청국 상인이 성황제에 참가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간혹 아이들이 집에 있는 엽전 등 옛날 돈을 가지고 와서 어떤 화폐인지, 감정가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화폐를 보자마자 감정해줄 능력이 없어 며칠을 고민하며 자료를 찾아 답해주곤 했다. 아이들이 가져오는 돈 중에 대부분은 상평통보이고 대일본제국 글자가 새겨진 일제 강점기 화폐도 있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청나라 화폐를 가져와서 감정해달라는 경우도 있었다. 청나라 화폐가 어떻게 아이들의 집에 남아 있게 된 걸까? 청나라 상인들이 원주까지 들어와 활동했음을 기록한 성황당 유래비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임오군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이 조선에서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해서 청 상인의 내륙 진출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청의 의도처럼 청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최혜국 조항을 앞세운 열강은 청이 차지했던 내륙 진출권을 똑같이 인정받았다. 일본 상인도 내륙 진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일본은 청과의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청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따라잡는 상황에 이르렀다. 일본은 청의 맹렬한 추격에 대응하기 위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청·일 전쟁을 도발한 배경이다.

이기원 북원여고 역사교사 wonju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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