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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곳곳으로 확산된 항쟁의 불길

기사승인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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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6월 항쟁의 자취를 따라서-②강원감영에서 지하상가까지

   
▲ 6월 항쟁 당시 원일로에서 전개된 거리시위. (사진 제공: 유창목 전 치악저널 발행인)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원주에서는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 참혹했던 광주의 소식을 전해주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대학생들과 농민회 회원들은 가톨릭센터에서 민속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각 대학에서 학생회와 탈춤 동아리 '탈반'을 조직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이후 각 대학의 학생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다.

전두환 집권 말기 군부 독재를 끝내고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자는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전두환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국민들의 요구를 모질게 탄압했다. 탄압으로 희생자도 속출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 폭로되고, 1987년 1월 남영동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의해 폭로되었다. 6월에 이한열은 연세대 교문 앞 시위 과정에서 최루탄에 희생되었다. 

1987년 4월 29일 원동성당 원주 교구 신부들이 4.13 호헌조치를 비판하며 농성에 돌입했고, 카톨릭농민회 회원들이 가톨릭센터에서 5월부터 동조 농성에 돌입했다. 5월 19일 자유시장 시계탑 앞에서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기습 시위를 전개하다 지도부가 모두 연행되었다. 천주교 원주 사제단에서 연행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 방문을 하고 연행자들을 중심으로 전원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에 돌입하면서 연행자들 모두가 석방되었다.

1987년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강원도 대회'가 전국 20곳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 원주에서는 6월 10일 오후6시 원동 성당 마당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6월 9일부터 경찰 병력은 대회장 주변을 봉쇄하고 대회 개최를 가로막았다.

6월 10일 원동성당 강원도대회 경찰 원천 봉쇄
학생·시민들 강원감영과 MBC 일대서 격렬 시위

▲ 6월 10일 원동성당을 향하던 시위대와 이를 막는 전경대가 맞섰던 강원감영 골목, 최루탄이 발사되고 투석전이 전개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원동성당 봉쇄 상황에 맞서 가톨릭센터에 상황실을 만들고 옥외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대회를 안내했다. 봉쇄와 연금을 뚫고 대회장에 도착한 12명은 원동 성당에서 오후6시에 대회를 시작했다.

대회장에 입장하지 못한 학생과 시민들은 강원감영과 MBC 방송국 일대에서 대회장 진출을 시도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전경들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대회장 진출을 막았다. 농민회 회원, 대학생, 시민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군청, 시립도서관, 남부시장 등으로 이동하면서 경찰에 맞서 시위를 전개하고 연좌 농성을 이어갔다.

6월 10일 국민대회 이후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을 끌어내기까지 원주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상지대와 연세대 학생들, 농민회 회원들,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거리 행진과 평화 행진이 이어졌고, 시민 대토론회가 열렸다. 최루탄과 지랄탄을 쏘며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시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시위를 말리는 어머니 앞에서 절규하듯 호소하던 대학생 아들, 잠시 휴전이 이루어져 거리에 주저앉아 쉴 참이면 주변 상인들이 시위대에 빵과 음료를 전해주었다. 시위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받은 빵과 음료의 일부는 맞은편에 앉아 쉬는 전경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방패를 들고 서 있는 경찰들에게 꽃을 나누어주며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부탁하던 어머니들, 흰색 가운을 입고 거리행진을 하던 연세대 의대 학생들의 모습, 천주교 신부와 수녀들, 개신교 신도들이 전개했던 거리 행진, 6월 항쟁 당시 원주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들이었다. 

이기원 북원여고 역사교사 wonju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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