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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국사 해린 스님의 유년시절

기사승인 202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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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수의 문화유산 썰-혜린 스님과 지광국사탑

   
▲ 법천사 동쪽 산기슭에 있는 지광국사 일대기를 기록한 지광국사 탑비.

지난해 12월 28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개관식이 열렸을 때 부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부론면의 기관과 자생 단체마다 중심가에 펼침막을 걸어 개관을 축하했고 예상과는 달리 많은 주민이 참석해주셨다. 참석자 중 몇몇 분들은 다소 감격에 들뜬 말씀과 표정으로 필자의 손을 잡기도 했는데, 그들은 필자가 계획한 지광국사탑 환수 전략을  잘 이해하고 환수운동의 행동가였기 때문에 법천사 유적전시관 건립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전기 왕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았던 해린 스님이 돌아가시고 세워진 승탑이다.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화장(火葬)을 한 다음 사리와 유골을 수습하여 탑에 모시는데 그 탑을 부도(浮屠) 또는 승탑(僧塔)이라고 한다. 그러니 승탑은 스님의 무덤인 셈이다. 덕이 높은 고승의 경우 특별히 탑의 이름을 지어주는데 지광국사탑의 이름은 현묘(玄妙)이다. 승탑을 세울 때 탑의 주인공인 스님이 살아온 행적을 기록한 비석도 함께 세운다. 

1070년 해린 스님이 돌아가시자 당시 국왕인 문종 임금은 스님의 시호(諡號)를 지광(智光), 탑호(塔號)를 승묘(勝妙)로 내리고 승탑과 비석을 조성하고 장례에 필요한 재원과 절차를 국가에서 충당하고 주관하였으니 스님의 장례는 국장(國葬)이었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시신을 화장하는 다비(茶毘)에서부터 승탑을 세워 유골을 탑에 모시고 비석을 세우는 일까지를 장례 절차로 본다면 해린 스님의 장례는 15년이 걸렸다.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긴 장례였다. 그만큼 해린 스님은 고려 전기에 영향력이 큰 스님이었다. 그런데 해린 스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 까지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지광국사현묘탑비의 비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해린 스님은 984년 도월(   月, 음력 12월) 그믐날(음력 30일) 원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주인 원휴(元休)이고 어머니는 이 씨인데, 스님을 잉태한 어머니는 강과 바닷물이 맑게 넘쳐흐르고 우물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태몽(胎夢)을 꾸었다. 이로 인하여 스님의 이름을 수몽(水夢)이라 지었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강물과 샘이 넘쳐 났으니 스님의 태몽은 상서롭기가 부처님의 탄생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태양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연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성품을 타고 났으니 큰 스님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

수몽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이수겸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수몽을 본 이수겸은 '나는 석학이 될 기량을 가르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밝은 스승을 찾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어느날 관상을 잘 보는 노인은 스님의 손금을 보고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리하여 어린 수몽은 법고사(法皐寺, 법천사의 오기인지 다른 이름인지 분명치 않다)의 관웅대사(寬雄大師)를 찾아가 공부를 하였다. 수몽이 관웅 스님을 찾아가기 전날 관웅 스님의 꿈에 새매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왼쪽 손바닥을 펴서 받들었다. 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절 후원에 들어와 놀다 날이 밝자 떠나간 일도 있었다. 다음날 스님이 찾아왔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수몽을 제자로 받아들인 관웅 스님은 수몽의 이름을 해린(海麟)으로 고쳐주었는데, 어느날 관웅 스님은 바닷가에서 손으로 고기를 잡아 삼키고 꿈을 깨었다. 해몽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물고기 '어(漁)'는 '비늘(鱗)'을 뜻한다 하여 해린(海麟)을 해린(海鱗)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 관웅 스님에게 공부를 배우던 해린은 관웅 스님이 고려의 서울, 개성으로 떠나자 해린도 스님을 ㅤ쫓아  개성의 해안사(海安寺)에 머물게 된다.

해안사는 개성시 곡령리 해안동 봉명산(鳳鳴山)에 있는데 고려의 역대 왕들의 영정을 모셨던 사찰이다.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절터에 동서 약 200칸, 남북 약 100칸의 초석이 남아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왕실의 후원으로 운영되었던 큰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고향 원주를 떠나 해안사에 정착한 해린은 최고 어른인 방장(方丈) 준광(俊光) 스님에게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된다. 해린 스님이 돌아가신 법천사는 원주 명봉산(鳴鳳山)에 있고,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된 해안사는 개성의 봉명산(鳳鳴山)에 있다. 글자의 배열은 다르지만 두 산 모두 봉황이 알을 낳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당이다.

 

박종수 전 원주시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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