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주의 전통공예(3)
![]() |
▲ 1957년 설립된 원주칠공예주식회사 본관 건물(2011년 촬영). |
일제강점기 식민정부는 원주의 옻나무에서 채취한 칠이 도료로서 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원주의 산과 들에 옻나무를 심었다. 당시 식민정부에서는 옻나무 증식 10개년 계획 세우고 대략 150만 그루의 옻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필자가 1997년 해미산성을 처음 찾았을 때 산성 부근에서 유난히 많은 옻나무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원주 칠공예의 요람이자 현대 한국 칠공예 분야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했던 원주칠공예주식회사와 관련된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공기관이 아니어서 회사와 관련된 문서들이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원주 칠공예주식회사 설립 초기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근무했던 박원동(강원도 무형문화재 칠정제장)의 기억에 따르면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고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떠났지만 그들이 원주 산야에 심은 150만 그루의 옻나무는 남아 있었다. 또한 해방이후 한동안 유지되었던 원성군청의 '옻칠계'가 1957년 폐지되자 칠 생산과 관리를 위한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원주의 몇몇 유지들이 폐지되는 옻칠계의 기능을 대신하여 1957년 1월 10일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 때 설립 취제역 사장인 장기철, 김창수 전무, 정순영씨 등이 뜻을 모아 관설동 국유림 5필지(반곡동 산103, 관설동 산12, 59, 61금대리 산 22번지)를 분수계약하여 총 150만 평에 옻나무와 낙엽송을 식재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원주에서 '칠공예주식회사'라는 다소 생경한 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원주의 옻나무에서 나는 칠에 열광하던 일본인들을 경험했고, 또한 일본인이 남긴 옻나무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2년 3월 박원동 씨를 강원도 무형문화재 칠정제 분야 기능보유자로 인정해 줄 것을 신청할 때 지정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박원동 씨로부터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박원동 씨가 보관하고 있던 원주칠공예주식회사 사진과 현판, 회사 실험실에서 사용했던 화학실험 도구, 칠 채취와 정제도구, 대형 소화기 같은 회사의 유산을 볼 수 있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던 박원동 씨는 교원 자격을 취득하고 교사로 일할 수 있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원주칠공예 주식회사에 취업해 실험실에서 일했다.
특히 필자가 놀랐던 것은 원주의 여러 곳에서 채취한 칠을 종이에 묻혀 수분이 번져나가는 정도와 색으로 칠의 품질을 판별하였던 실험 노트였다. 노트에는 수십 년에 걸친 옻칠 자국과 연필로 쓰여진 옻칠 채취 장소, 날짜와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문화재위원과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 때 이를 본 심의 위원들은 모두 놀랐다. 이 노트들이 박원동 씨를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칠정제 분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태장동 2천여 평의 부지에 세워진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주요사업은 천연 도료의 생산과 수출이었지만 1968년 칠공예품 제작으로 확대하게 된다. 회사의 조직은 칠정제부와 칠공예부(1968년 신설) 그리고 회사의 전반적인 운영과 판매를 담당하는 지원부서가 있었다.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는 모두 5동의 건물이 있었고 4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였다. 원주가 가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칠을 정제해서 일본에 수출하는 일에 주력 했지만 소나무의 송진을 정제하여 유화(油畵)에 사용하는 테라핀을 생산하는 일도 함께 하였다. 원주칠공예주식회사는 칠과 송진을 정제하기 위하여 독일에서 정제기를 수입하여 의욕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주력 업종은 칠과 테라핀 같은 예술품의 재료를 생산하여 수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칠과 테라핀 같은 원재료 수출만으로는 기대했던 것만큼 수익이 미치지 못하였고 회사 경영도 어려웠다. 1961년 원주칠공예주식회사는 스스로 경영하기 어려워 강원석유주식회사에 경영권을 양도하고 자회사가 된다. 칠공예주식회사를 인수한 강원석유 박만희 사장은 칠공예주식회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칠공예품 제작을 위하여 우수한 장인을 찾고 있었다.
회사의 사정을 전해들은 횡성 출신 칠장 홍순태 선생은 당대 최고의 나전칠공예 장인이자 1967년 칠공예분야에서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일사 김봉룡 선생을 소개하였다. 1968년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는 통영에서 활동하던 일사 김봉룡 선생을 공예부장으로 초빙하게 된다. 당시 일사 김봉룡 선생은 그와 함께 작업 했던 소목장 천상원, 끊음질 심부길, 칠장 홍순태 같은 칠공예 분야 장인들에게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고, 당대의 거장들이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일사 김봉룡 선생과 그의 권유로 당대의 칠공예 대가들이 함께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 취업하게 된 것은 원주 칠공예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때까지 원주는 우수한 칠의 산지로 알려졌지만, 그 재료를 다루어 수준 높은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칠산지에 불과했던 원주가 칠공예도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68년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일사 김봉룡 선생의 초빙이었다. 또한 김봉룡 선생 초빙과 함께 원주 시공관에서 옻칠공예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원주에서 열린 최초의 나전칠공예 작품 전시회였다.
전쟁 직후 암흑기에서 예술품의 재료로 쓰이는 칠과 테라핀을 생산하고 당시 칠공예 분야 대가들을 초빙하기까지 한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앞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김봉룡 선생이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1968년 회사에 세 번의 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회사 공예부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김봉룡 선생은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사직하게 된다. 이후 부침을 겪다 원주칠공예주식회사는 1981년 4월 문을 닫게 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