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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등재특집-3] 건원릉의 베일을 벗긴다
조선왕릉의 교과서...공민왕릉이 모델, 봉분에는 억새가 자라
2009년 07월 21일 (화) 19:03:17 한철수 편집위원 guji2311@hanmail.net

지난 6월 27일 자정을 넘긴 시간 스페인 세비야에서 낭보를 전해왔다. 유네스코(UNESCO)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우리나라가 신청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이 세계문화유산(World Cultural Heritage)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문화유산 8곳, 자연유산 1곳 등 9곳의 세계유산을 보유하는 나라가 되었다.

남양주투데이에서는 유네스코에서 "신의 정원"이라 부른 조선왕릉 40기. 그 40기의 근간이 된 건원릉이 지닌 비밀을 풀고, 베일에 가려졌던 관내에 산재한 동구릉, 사릉, 광릉, 홍유릉의 궁금증을 매주 하나씩 풀어나가려 한다. <글쓴이 주>

   
건원릉 정자각에서 바라본 능상. 세계유산 등재이후 베일을 벗고 있다.

제3부 건원릉의 베일을 벗긴다

건원릉은 조선왕조의 개국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능침이다. 이 능침을 조선시대 왕릉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  새 나라를 열었지만 아직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태조의 죽음은 조선왕실 장례문화의 한 획을 긋는다.

-건원릉의 모델은... 고려 현정릉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은 자주독립 선포와 왕권강화를 모색하고 고려만의 독특한 능제로 완성한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과 그의 부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1365)의 능인 현정릉(현정릉)을 모델로 삼았다.

유교(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은 후한 광무제의 왕릉형식과 절충하면서 절대왕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왕릉을 만들게 된다. 태종5년(1405)에 정한 예장과 증시에 관한 법[예장증시법(禮葬贈諡法)]과 이듬해(1406) 능침보수법(陵寢步數法)을 받아들였고, 건원릉의 역사(役事)는 고려사람 박자청이 진두지휘하게 된다.

   
건원릉의 모델이 된 고려 31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정릉(일강이릉 형식. 사진제공: 문화재청) 

-건원릉을 만든 이는...박자청

박자청(朴子靑, 1357~1423)은 고려말 황희석의 하인에서 조선초 의정부참찬, 판우군도총부사, 공조판서 등을 거치며 당상관(당상관)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스승은 원나라에서 환관을 하다가 공민왕과 귀국한 김사행(金師幸:?~1398)으로 고려의 현정릉, 조선의 경복궁,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등 개국초 궁궐과 왕비의 능을 만들었으나 왕자의 난에 연루돼 이방원(태종)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박자청은 김사행 아래에서 토목을 배웠고 창덕궁, 성균관, 연경사(신의왕후 한씨의 제릉의 원찰)은 물론 경복궁 남쪽에서 종묘까지 이어지는 행랑, 동대문 밖 마장(馬場), 수강궁, 태평관 어실(御室), 살곶이다리, 풍양 이궁(離宮=행궁.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연희궁을 건설하는 등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만들어 낸 건축가이기도 하다.

건원릉 조영(造營)과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願刹)인 개경사 건립은 그의 업적 중 백미(白眉)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마지막 작품인 태종의 헌릉(獻陵)을 만들고, 세종 5년(1423) 11월 9일 6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하자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그를 위한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했다.

-건원릉의 규모는...161보

   
항건원릉(사진제공. 문화재청)

건원릉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동기는 태종8년(1408) 5월 24일 태조가 승하(昇遐. 왕의 죽음을 일컬음)하자 태종의 명을 받은 하륜(河崙)이 이양달(李陽達), 유한우(劉旱雨), 이양(李良) 등과 도성인근의 양주, 고양, 파주 등 능자리를 찾는다.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당시 양주의 검암산(儉巖山) 아래 이곳을 선택하였다.

건원릉(健元陵)은 '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원(元)"자와 '쉬지 않고 운행되는 하늘의 도'라는 의미에서의 "건(健)"자를 따 능호를 삼았다.

건원릉이 조성 될 당시 크기는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원릉산(原陵山)의 절반으로 했으며, 원릉산의 사방 365보를 161보로 줄였으며, 사면을 80보로 정하였다. 여기서 1보는 주척으로 6자로 180cm에 해당되며 길이는 약 290m, 폭은 약 140m나 된다.

-건원릉의 봉분(封墳)은...억새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나 말년은 불행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으며 자식들과 근친, 개국공신들을 잃게 된다. 첫 번째 왕자의 난은 태조 자신이 자초했다. 바로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 둘째(전체 8남)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삼아 결국 강씨 소생 두 아들을 잃고, 둘째 아들 영안대군 방과(정종)에 왕위를 넘겨준다. 2년 뒤 넷째아들 회안대군 방간이 두 번째 왕자의 난을 일으켜 다섯째 정안대군 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건원릉의 봉분에는 600년전 이성계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가 자라고 있다.

이태조는 많은 회의를 느끼고 고향땅 함경도 함흥에 자리를 잡게 되며,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시대어(時代語)를 낳게 된다. 이성계는 평소에 고향 함흥 땅에 묻히고 싶다는 했으며, 그 뜻이 여의치 않자 신의왕후의 정릉에 수릉(壽陵=가묘)를 만든다.

태종은 이러한 아버지의 처사에 아쉬움이 남은 채 결국 아버지의 임종을 보게 되고, 아버지의 유지를 조금이나마 지키려고 태조 고향의 흙을 공수해와 능상에 입힌다. 마침 그 흙속에 억새의 씨앗이 자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억새의 올곧은 생장을 위해 매년 한식에 한번 벌초를 한다. 사시사철 위엄어린 모습으로 있다가 늦가을 혹은 초겨울에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장관이다. <자료제공: 구지옛생활연구소>

   
동구릉 전경.

[참고자료] 고려조선능지(목을수 편저. 대성당 1988), 기내능원지(경기도. 경인일보사. 1988),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편찬위원회), 한국사 '중세편'(진단학회.을유문화사. 단기4283), 한국인물사 '조선의 인물'(양우당. 1983), 조선시대의 능원(이창환. 문화재청교육자료. 2009), 조선왕릉 동구릉의 역사와 문화(제1회 구리건원학술대회. 구리문화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원. 1993), 구리시의 문화와 역사의 숨결(한철수 편저. 구리시. 1994), 구리향토사자료집(한철수 편저. 구지옛생활연구소. 2002), 대동야승(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5). 인터넷(문화원류사전,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국회도서관, 규장각, 한국학데이터베이스) 등 다수

***다음은 "건원릉 상설의 비밀" 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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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동주민
2009-07-28 00:31:32
조선왕릉에 박자청이 있었군요
즐감하고 열공하고 있습니다.
다음이야기도 기대 됩니다.
홍유릉이야기는 언제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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