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뿌리 깊은 항일정신으로 독립운동 앞장"

기사승인 2019.02.25  

공유
default_news_ad1

- 3.1운동 100주년 특집기획: 그날의 함성

   
▲ 원주 최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소초면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 소초면사무소에 건립한 소초면독립만세기념비. 그해 4월 5일 제막식에서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부론면, 노림의숙 시발점 만세운동 들불처럼 번져
소초면, 동학·의병 영향 원주 최대 만세운동 전개
2천300여 명 참가 140명 체포…고문 태형에 신음


향토사학자들은 원주의 만세운동이 그 역사적 의미와 역할에 비해 평가절하 되어왔다고 말한다.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과 유족들의 노력으로 관련기록들이 발굴되면서 부론·소초면 만세운동 등이 새롭게 조명받기 전까지 원주의 만세운동은 인근 횡성만세운동의 그늘에 가려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원주의 뿌리 깊은 항일정신은 동학과 의병전쟁, 계몽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졌다는 게 관련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1919년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돼 투쟁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갈 때 원주는 일제에 의해 집중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게 된다. 그해 3월 초 원주보통학교 생도들이 고종 임금의 장례를 맞아 조의의 상징으로 삼베 천으로 만든 상장(喪章)을 달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원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이던 김정열이 태극기를 만들고 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발각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이 일자 일제는 3월 16일 춘천 79연대 소속 보병 20명을 원주에 증파하고 4월 초에는 본토에서 1개 중대의 보병을 추가로 파견, 경계 강화에 나선다.

윤병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타 지역의 만세운동은 경비가 강화되기 이전이지만 원주는 일제의 경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삼엄한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마을 곳곳마다 만세 시위와 봉화 시위를 전개했다"며 "타 지역이 주로 동족마을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면 원주는 천도교도와 동학교도, 의병 출신, 학생, 유생,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을 주동하거나 적극 참여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 원주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부론면 독립만세운동을 선양하기 위해 부론면사무소 앞에 건립한 부론독립만세기념비. 지난 2008년 11월 17일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만세 삼창을 외치고 있다(왼쪽).

원주 최초 성공한 만세운동
1919년 3월 27일 부론면 노림의숙(魯林義塾) 만세운동은 원주 최초의 성공한 만세운동이면서 이후 소초, 귀래, 흥업 등지로 활화산처럼 번진 원주만세운동의 도화선이다.

2005년 발간된 원주독립운동사에는 홍남표, 어수갑 등 교사들이 배포한 독립선언서를 통해 3.1독립만세운동을 인지한 한범우, 한돈우, 한민우, 한태우, 김성수, 정현기, 김일수 등 당시 노림의숙 학생 7명이 졸업식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학생들은 당일 시국강연회 참석차 노림리를 지나던 당시 원주군수 오유영을 강제로 만세운동에 참여시키고 마을 주민 수십명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 억압받던 민중의 자주 독립의지를 피력했다.

이 소식은 곧 원주 전역으로 확산, 전파돼 수많은 만세운동을 촉발시켰다. 3월말 이근원, 정우진, 이근성 등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이 법천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다 광고문이 사전에 발각돼 미수에 그쳤지만 4월 9일 밤 표광천, 지천복 등의 주도로 주민 수십여명이 참여한 봉화시위가 법천리에서 전개됐다.

법천리 봉화시위는 이틀 후 손곡리로 이어져 11일 밤 김복기, 정완용, 이재관, 이은교 등의 주도아래 주민 수 십 여명이 참여한 봉화시위가 연속적으로 전개됐다.
최근 발간된 '1919년 3.1운동과 원주' 학술도록을 기획한 김성찬 원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담당은 "부론면은 원주최초로 만세운동이 성공한 지역이면서 원주전역에 항일 독립의지를 전파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라고 말했다.

▲ 원주활동 독립운동가 현황(자료제공: 항일독립운동 원주기념사업회)

2회 걸쳐 600명 참가 최대 규모
소초면 만세운동은 당시 원주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 중 최대 규모로 전개됐다. 1919년 4월 5일 일어났으며, 2회에 걸쳐 600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원주시사에 기록돼 있다.

소초면은 행정적으로 원주군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 횡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3월 27일과 4월 1일 횡성읍내에서 대규모로 전개된 횡성만세운동에는 소초면 주민들이 대거 가담한다. 하지만 소초면 주민들의 횡성만세운동 가담은 단순한 참여에 그치지 않았다.

심의성(1977년 작고) 애국지사는 1972년 남긴 자신의 회고록에서 "1919년 3월 20일경 의병 강도영의 아들 천도교인 강만형(姜萬馨)이 이웃에 사는 강달회(姜達會:일명 士文)·하영현(河永賢:일명 하돌림)과 횡성 천도대교구장 최종하를 만나 횡성과 소초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했다"고 전한다. 횡성만세운동의 중심에 소초면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소초면 만세운동은 4월 1일 횡성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서 강달회와 하영현이 일제의 발포에 피살된 것이 도화선이 됐다. 피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구한말 의병으로 활약하다 둔둔리에 숨어 살며 서당 훈장을 하던 박영하와 평장리 신현철 등이 주축이 돼 4월 5일 부채고개에 집결한 600여 명이 소초면사무소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마을주민이 피살된 것에 대한 위로의 성격으로 출발한 것이어서 시위 참가자들은 이 날 오후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으나 4월 7일 새벽 헌병보조원들이 주동자 17명의 집을 급습해 원주헌병분견대로 압송해 갔으며, 주동자 중 한 명인 신현철은 징역 1년형을 받았고 그 외 가담한 주민들도 태형 등 처벌을 받았다.

윤병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일제의 국권침략에 대항한 소초면민의 투쟁은 국가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려는 우리 민족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며 "당시 의병투쟁과 손병희 선생 등 천도교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소초면민의 자주정신과 민족의식은 그 어느 지역보다 성숙했다"고 설명했다.

원주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
부론을 시발점으로 소초에서 폭발한 원주사람들의 항일정신은 이후 귀래·문막·지정·흥업·호저 등지로 들불처럼 번진다. 

귀래에서는 귀래리(貴來里)를 중심으로 4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한 유학자 서상균은 일제가 시위 가담자를 색출하자 "일본군에게 붙잡혀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문막(당시 건등면)에서는 반계리·동화리·궁촌리 등에서 4월 8일부터 봉화를 올리면서 만세시위를 했으며, 같은 날 매사동(梅沙洞)과 동화동(桐華洞) 뒷산과 언덕에서도 수십 명씩 참여한 봉화 시위가 이어졌다.

지정에서도 4월 8일과 9일 이면직, 유복열, 이석경 등의 주도로 보통리와 가곡리, 간현리, 안창리 등지에서 마을주민 수십명이 참여한 봉화시위가 전개됐다. 당시 건등리 등안(登岸), 지정면 흥법동(興法洞)·창촌(倉村)·월운동(月雲洞) 뒷산과 간현리(艮峴里) 방면에서도 불길이 오르고 만세소리가 사방에서 수 없이 들려왔다고 전해진다. 

흥업에서는 8일 사제리 주민들이 마을 앞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으며, 9일 밤에는 흥업리 주민들이 자주봉(문필봉)에 올라 보다 강력한 시위를 전개했다. 주민 40여명은 고종 임금의 망곡례(望哭禮)를 지낸 언덕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면사무소로 몰려가 당시 면장인 서정우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호저면에서는 당시 횡성군 서원면에 속해있던 매호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4월 12일 밤 향산마을 주민 50여명이 향산마을과 수동마을 사이에 있는 동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자 상촌마을과 수동마을 주민들이 합세했다. 이들은 밤새 수동 마을에서 상촌 마을, 상촌 마을에서 조항 마을로 옮겨 섬강 건너 원주 지정면 무장리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김성찬 원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담당은 "원주의 경우 만세운동 참가자가 2천300여 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검거된 인원은 140여 명이었으며, 재판을 받은 사람도 공식기록만으로 30여 명에 이른다"며 "이를 통해 원주 사람들이 품고 있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굉장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원주권 만세운동 전개일지
한달 간 25회 시도…사망 2명 부상 1명
 

3월
13일: 원주읍 시위기도(미수)

16일: 원주 공립보통학교 상장시위(미수)

27일: 부론면 노림리 만세시위(7명 참가)

27일: 횡성장터 만세시위(소초면민 주도, 50명 참가)


4월
1일: 횡성장터 만세시위(소초면민 주도 50명 참가)

5일: 소초면 평창리 만세시위(600명 참가)

7일: 귀래면 귀래리 만세시위(100명 참가)

8일: 귀래면 귀래리 만세시위(200명 참가)

8일: 건등면 반계리 봉화시위(100명 참가)

8일: 건등면 동화리 봉화시위(50명 참가)

8일: 건등면 궁촌리 봉화시위(60명 참가)

8일: 지정면 보통리 봉화시위(수십명 참가)

8일: 지정면 가곡리 만세시위(수십명 참가)

8일: 지정면 간현리 봉화시위(수십명 참가)

9일: 지정면 안창리 봉화시위(수십명 참가)

9일: 지정면 안창리 봉화시위(수십명 참가)

9일: 부론면 법천리 봉화시위(수십명 참가)

9일: 흥업면 흥업·사제·매지리 봉화시위(500명 참가)

11일: 부론면 손곡리 봉화시위(수십명 참가)

12일: 호저면 분일리 봉화시위(200명 참가)

미수(2건), 성공(23건, 횡성 2회 포함) 참여인원(2천300여명) 검거(140여명) 사망(2명) 부상(1명)


원주 3.1운동 독립유공 인물

 

김민호 기자 hana016@hanmail.net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