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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산실

기사승인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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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의 역사 한 스푼, 원주의 등록문화재- ③ 원동성당

   
▲ 국가등록문화재 제139호 원동성당. 1970년대 유신정권 당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고 '원주선언'을 한 곳으로,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다.

현재의 원동성당 건물은 개항 무렵 근대 성당 건축양식을 온전하게 계승하진 못했다. 6·25 전쟁으로 불타기 전에는 고딕 양식이었는데, 1954년 다시 세운 성당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동성당을 원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중 가장 의미 있는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변방 강원도의 작은 도시였던 원주가 1970년대 전국에서 주목받는 민주화의 성지로 부각되는 과정에서 원동성당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동성당, 1971년 원주 문화방송 운영 과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5.16 장학회를 상대로 천주교 원주교구가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지학순 주교가 중심이 되어 부정부패 추방운동은 이후 유신정권에 대한 지속적 저항으로 이어졌다. 

1974년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을 내세워 지학순 주교를 체포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석방된 지학순 주교는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공개 선언하여 다시 구속되어 15년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회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4년 9월 원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출범했다. 

1975년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중지시키고, 집회시위를 불허하는 긴급조치 9호가 내려졌다. 1976년 1월 23일 천주교 사제와 개신교 목사들은 원동성당에서 열린 신·구교 합동 기도회 자리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원주 선언'을 발표하였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출범 '원주선언' 발표
1970년대 전국서 주목받는 민주화 성지로 부각

▲ 1975년 7월 20일 200여 일만에 석방된 지학순 주교가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을 향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당시 원주 인구는 10만이 조금 넘었는데 3만 명이 원주역으로 모여들었다. (사진 제공: 원주역사박물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민주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했던 분이 장일순이었다. 1970년대 사회정의구현 촉구 가두시위를 지학순 주교와 함께 주도했고, 민청학련 사건 당시 활동자금을 지원하고 구속 학생 구명을 위한 활동, 카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을 지원했다. 1970년대 장일순과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모임을 '원주 캠프'라 불렀다.

저임금과 저곡가를 바탕으로 한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은 급격한 이농 현상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농촌 중심의 협동조합을 벗어나 농민과 도시의 만남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직거래 운동 '한살림'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 장일순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원주에서도 치열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 이후 천주교 원주교구 신부, 수녀들의 단식기도가 전개되었고, 원주지역 민주헌법쟁취 운동본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6월 항쟁까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지대, 연세대 원주의대, 영강교회를 중심으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집회와 시위, 시국대토론회가 전개되었다. 원동성당-중앙시장 앞 원일로-시청 교차로(현재 원주시보건소 자리)를 중심으로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항쟁이 전개되었다.

억압과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천주교와 개신교가 손을 잡고, 학생과 시민들의 뜻과 의지를 하나로 모았던 곳, 서슬 퍼런 독재에 맞서 간절한 마음으로 민주주의 씨앗 하나씩 품고 처절하게 저항했던 중심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원동성당이 있었다.

이기원 북원여고 역사교사 wonjutoday@hanmail.net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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