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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금 마련하려 우편 차량 탈취

기사승인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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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의 역사 한 스푼-횡성 출신 최양옥 지사

▲ 최양옥 지사의 공적비. 최 지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중퇴하고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로 내려와 횡성 3.1운동에 참가했다.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 출신인 최양옥은 1913년 원주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원주 공립 보통학교는 원주 초등학교의 전신인데 최양옥은 20살의 나이에 입학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아주 늦은 나이에 입학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최양옥처럼 늦은 나이에 입학하는 사례도 꽤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뛰어들었던 사례도 많았다. 당시에는 20살 전후 학생들도 포함된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양옥은 서울에 있는 중앙 고등 보통학교로 진학했다. 최양옥은 서울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신덕영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로 내려와 횡성 3·1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소초면 사람들은 횡성 장날에 장을 보는 등 횡성과 같은 생활권에 속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횡성 장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3·1운동에 소초 일대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후 소초면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최양옥은 신덕영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만주 농림 주식회사 주식 모집원으로 가장해 지방으로 내려가 부호들 집으로 잠입해 들어가 대동단 명의의 포고문과 경고문을 보여주고 군자금을 요구했다. 군자금 모집 활동이 계속되면서 일본 경찰의 검거 작전도 강화되어, 촤양옥은 11월 광주로 향하던 중 체포,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 횡성군 갑천면 진촌리 산에 위치한 최양옥 지사의 묘.

1926년 대구 형무소에서 출옥한 최양옥은 소초면 둔둔리에 거주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신덕영과 함께 대한 독립 공명단을 조직했다. 대한 독립 공명단은 중국에 무관학교와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활동했다. 무관학교와 비행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과 국내로부터 들어오는 후원을 기대했지만, 기대를 채우기에는 넘어야 할 장벽이 높기만 했다. 

중국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면서 최양옥은 우편 차량을 탈취해 자금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우편 차량에는 우편물 외에 현금도 실어 운반했기 때문이다. 

우편 차량 탈취를 위해 국내로 들어온 최양옥 일행은 1929년 4월 18일 경기도 양주군 마석고개 길목에서 춘천에서 올라오는 우편 차량을 기다렸다. 최양옥 일행은 춘천에서 출발한 경성 우체국 제7호 차량을 공격, 탈취했다. 하지만 차량에는 현금이 없었다. 계속해서 서울에서 춘천을 향하던 오성 자동차 소속 447호를 세워 현금 33원을 탈취했다. 

최양옥 일행의 행적이 알려지자 곧바로 일본 경찰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최양옥 일행은 양주 천마산 일대에서 교전을 치르기도 하면서 피신을 계속하다 4월 2일을 전후로 대부분 체포되었다. 체포된 최양옥은 치안유지법 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 우편법 위반, 강도의 죄목으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39년 만기 출소했다. 해방 후 최양옥은 서울, 인천 등에서 서무과장, 형무 소장으로 근무했다.

 

이기원 북원여고 역사교사 nmpry@naver.com

<저작권자 © 원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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